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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큰 스승 지다… 김우룡 전)효명교장 타계

기사승인 2020.02.18  17: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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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우룡 선생 어록 연재(1)

수많은 제자와 지역 인사들 깊은 애도

동문 체육대회 때 고인 추모제 제안도

선생님 추모하며 효명 30년 어록 연재

 

김우룡 교장선생님은 가셨다. ‘효명중고등학교’에서 교감과 교장으로서 30년 세월을 봉직하시며 큰 가르침을 주신 님은 이제 더 이상 뵐 수가 없다.

지난해 5월 11일 모교 진리관에서 99세의 삶을 경축하고 천수를 기원하는 ‘白水宴’ 자리에서 뵈었을 때는 강건하셨는데, 제자들과의 약속을 잊으셨는지 2020년 설날 다음 날 홀연히 떠나셨다.

당시 총동문회 집행부와 연대하는 장학회, 효동회, 시청동우회, 과별동문회, 농협, K-55 등의 소위원회에서 김우룡 교장선생님이 타계하시면 ‘효명장 영결식 준비위원회’를 추진하자고 언급했는데 이렇게 황급히 가셨으니 제자들은 황망하다.

제자들이 아니면 조문객도 없을 터인데, 더구나 설 연휴라 문상객도 변변치 못했으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지하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보고팠을까? 사실 설 연휴 끝자락이라 이해는 가기도 했지만 옛말에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지만 정승이 죽으면 썰렁하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발인 아침은 겨울답지 않게 평소 고인의 인품과 근엄한 모습처럼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장례식장을 출발해 학교운동장 사열대에서 일가친지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제를 지냈다. 노제를 마치고 용인화장장에서 고인의 유골이 유가족에게 인계되는 과정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올해 10월 3일 동문체육대회 때는 고인의 추모제를 지냈으면 한다.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이 한 송이 국화라도 헌화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효명동산 나지막한 청솔 사이로 느껴보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사제지간의 정취를 잠시라도 그려보면 좋겠다. 우리는 가끔이라도 선생님을 생각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만추의 하늘을 보며 옛날 그 옛날의 애잔한 추억을 그려보면 안 될까?

갑작스런 비보에 참석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김우룡 교장선생님이 남기신 30년 교정생활 어록을 연재로 남긴다.

김우룡 교장선생님은 생전에 “효명은 개교 64주년과 함께 효명의 성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지난 세월의 갖가지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며 남기신 어록 중에서 “이제 효명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되돌아 지난 30년(1957년∼1986년)세월에 담긴 효명과의 삶을 되새겨 본다”고 하셨다.

 

서정리성당에서 야학 시작이 효명의 모태

이석종 선생의 2만3,000평 땅에 학교건립

학생들과 힘모아 솔밭 가꾸고 지키기 운동도

 

효명의 출생과 성장

1952년경 한국전쟁이 한창일 당시 이곳에 오산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찾아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 못지않게 시급한 것이 자녀교육문제였다. 중학교가 전무한 이곳에서 당시 서정리성당 유수철 주임신부님이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동 50여명을 사제관에 모아 야학을 시작한 것이 효명의 모태였고, 다음해 1953년 5월에 정식으로 중학교 인가를 받아 개교한 것 효명중학교다.

효명중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거의 영세한 가정의 자녀였으므로 타지방 고교에 갈 처지가 못 되어 이 고장에 고등학교가 또 필요하게 되었다. 이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1957년 효명공업고등학교가 건축과 한 학급으로 개교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성교육에도 부합한 학과인 상과를 설치하고 기계과, 전자과, 보통과를 둔 이른바 종합학교로 발전했다. 이 고장에서 여러 학교가 분담해야할 각종 교육을 효명이 도맡아 짊어지고 어려운 처지에서 그 많은 시설투자와 정성으로 이 고장 청소년 교육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자부한다. 마치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처럼. 그러나 시대는 또 발전해 다양성보다는 전문성을 더 요구하는 시대로 변하면서 종합이라는 두 글자가 오히려 효명발전에 걸림돌이 될 줄은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다.

 

서정리성당 지역에서 현재 효명 위치로

1957년 고등학교가 병설되면서 효명의 식구는 날이 갈수록 급증해 불과 700평 남짓한 개교당시의 부지로서는 더 이상 교육활동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자 부지확장이 큰 과제로 등장했다.

학교와 인접한 남쪽 배 밭을 절충했더니 평당 200원을 내란다. 최소한 2,000평 이상은 확보해야 하는데 학교의 능력으로서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여기저기 물색하던 중 개교 초기부터 수고하시던 이석종 선생님의 종중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위치는 구 위치에서 약 1km정도 남쪽이고 넓이가 약 2만3,000여 평의 구릉지로 학교부지로서는 대학을 세워도 손색이 없을 땅이다. 이석종 선생님은 유수철 신부님의 건학정신에 감동되어 여러 차례 종친회를 열어 평당 20원에 2만3,000평의 부지를 내주었다. 평당 20원은 종친회에 대한 명분이고 실은 거의 희사한 바나 다름없다.

 

운동장 조성과 솔밭 가꾸기

1959년 새 부지에 포크레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세는 평편한 언덕으로 군데군데 오목해진 곳이 있어 각종 시설을 하는데 다양성이 있었다. 먼저 남쪽 한가운데 3,000평을 대운동장으로 잡았다.

산 전체가 어린소나무로 덮였었다. 울타리도 없고 그때는 연탄도 없던 시절이라 효명동산의 어린 소나무가 근방 부락민의 연료이고 울타리 감이였다. 나는 이 황금 같은 산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전교생을 파수꾼으로 세워 각 소나무마다 전교생의 이름표를 하나씩 부치고 일인 일 소나무 지키기 운동을 펼쳤다.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먼저 하는 일은 산에 가서 내 나무가 밤사이 무사한가를 확인하는 것이 첫째 일이었다. 이 운동이 내 학교 사랑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효명은 애교심이 각별한 학교라는 말을 듣는다.

노용국 기자 rohykook@hanmail.net

<저작권자 © 평택시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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