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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효명 곁에서 눈 감고 싶은 것이 마지막 소원

기사승인 2020.06.23  2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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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김우룡 교장 어록 중에서(7)

김우룡 교장은 효명 개교 64주년에 즈음해 효명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사람으로서 갖가지 사연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 교장이 남긴 어록은 지난 1957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세월의 기록이며 그 한 가운데 있던 그의 삶을 되새겨 본 것이다. 지난 1월 초에 타계한 효명의 산증인 고 김우룡 선생의 어록을 실어 그를 추모한다.

 

교직 30년, 퇴임 후 27년 효명 잊지 못해 지팡이 짚고 찾아

간절히 기도하면 기적같은 도움주신 하느님 은총 잊을 수 없어

“우리 효명의 은인”이란 말에 30년 동안 고난 눈 녹듯 사라져

 

참되게

참되게라는 교훈은 우리인간이 참된 진리를 찾아 인간답게 살자는 뜻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느님 사랑의 계명(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인데 이 계명을 실천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수년 동안 고민하였다.

1970년 중반쯤으로 기억된다. 서울에 사적인 볼일이 있어 상경했다가 주일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다. 강론은 미국신부님께서 하셨다. 강론의 요지는 “나는 한국에 온지 5년째 된다. 5년 동안에 17차례 헌혈에 참여 했는데 한국 사람을 가장 쉽고 짙게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가 내 소중한 피를 나누는 헌혈이다”라는 것이다.

나는 그 강론을 듣고 나이 50이 넘으면서 내 민족을 위하여 단 한 번도 헌혈을 한 적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미사가 끝나는 대로 조금 주저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성모병원에 들어가 헌혈을 하였다. 그렇게 두려웠던 헌혈이 나에게 이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나는 학교로 돌아와 바로 이거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 할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으로 전교생에게 헌혈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했다. 전교생에게 그간의 나의 경험을 말하고 헌혈은 절대로 몸에 해롭지 않고 여러분과 같이 혈액이 왕성한 시기에는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하고 경기도 혈액원에 학생들의 헌혈을 자원했다.

첫 번째 헌혈은 아직 마음의 공포가 있어서인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두 번째 부터는 나와 선생님들이 먼저 헌혈에 앞장서고 지난번 헌혈에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앞장서니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참가하여 2년 후에는 경기도에서 가장 헌혈을 많이 하는 학교로 이름이 났다.

 

효명과 함께 받은 훈·포상 각종 수상경력(연대순)

그간의 노력으로 얻은 학교의 공원화, 역도, 테니스 부문에서 국가대표급 선수발굴, 종합학교로서 취업률, 진학률 우수교, 헌혈운동 우수교, 학교운영의 민주화 등의 공로로 종합상이라 할 수 있는 경기도 문화상(교육부문)을 경기도 지사로부터(1985. 12. 20) 받았다.

국민훈장 석류장(1978. 12. 05), 교육감 표창(1980. 12. 13), 동창회 주최 회갑연과 승용차 증정(1981. 07. 15), 경기도지사 표창(1982. 09. 22), 대한교육 연합회 회장표창(1982. 11. 10), 문교부 장관 표창(1982. 11. 10), 경기도 문화상(1985. 12. 20), 경기도지사 감사패(1986. 08. 27), 재단이사장 김남수 주교 공로패와 행운의 열쇠(1986. 08. 27), 국민훈장 동백장(1986. 08. 31), 대한적십자사 헌혈부분 감사패(1986. 10. 27), 내부무 장관상(1987. 09. 22), 평택시 문화상(1998. 05. 08)

 

맺는 말

내가 효명에 부임한 날은 1957년 4월 1일 효명공업고등학교가 개교되는 날이다. 직책은 교감이지만 실질적 업무를 모두 맡아 달라고 하였다. 부임 첫 일주일동안 학교와 주변 환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학교의 모습은 손바닥만한 운동장에 건물은 초라한 교실 10개 뿐, 학교가 소재하는 서정리 북쪽 2km 지점에는 k-55 미 5공군 주둔지로 악명 높은 쑥고개 속칭 텍사스촌이었다. 자녀를 많이 둔 나로서는 가족을 데리고 올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사의를 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5~6명의 간부학생이 달려와 우리는 주일 동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선생님의 강의와 학교에 쏟는 정성에 우리는 이제부터 교육다운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희망에 벅찼는데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세요! 하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학생들의 정에 못 이겨 주저앉은 것이 정년 할 때까지 30년, 정년퇴임하고 또 27년 아직도 효명을 잊지 못해 효명이 궁금해서 지팡이를 짚고 효명을 찾아간다.

가진 것이라고는 두 주먹 뿐 겁도 없이 학생들의 요구대로 일반 인문계 고교의 몇 갑절 힘든 종합고등학교를 운영하면서 내 최선을 다해도 힘이 못 미칠 때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외부 원조기구를 통해 기적 같은 도움을 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잊을 수가 없다.

파란만장한 효명에서 30년 그 속에서도 나에게 크나큰 보람을 남겨준 효명과 이별을 해야 할 날이 왔다. 1986년 8월 26일 정년퇴임 하던 날 김남수 주교님께서 공로패와 행운의 열쇠를 주시면서 “김 교장은 우리 효명의 은인입니다”라고 하신 말씀에 지난30년 동안의 고난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생명 북한 선조들 곁에 묻힐 희망은 없고 내가 사랑하는 효명 곁에서 나를 아껴주는 많은 제자들이 있는 이 송탄에서 눈을 감고 싶은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노용국 기자 rohykook@hanmail.net

<저작권자 © 평택시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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